삼가 「두문동서원(杜門洞書院)제도실록」을 살펴보면 서원 十一칸과 문간 三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정절실(靖節室), 항절실(抗節室), 순절실(殉節室), 표절실(表節室)의 네 집으로 구분되어 있다. ○또 표절실실록(表節室實錄)을 살펴 보면 태학생현선생(太學生玄先生), 온수감인선생(溫水監印先生), 직절인선생(直節印先生), 적암서선생(積岩徐先生), 이우당이선생(二憂堂李先生), 악은심선생(岳隱沈先生), 밀직고선새(密直高先生), 복애국선생(伏崖鞠先生), 제문하성사신선생(制門下省事申先生), 퇴우당신선생(退憂堂申先生), 신구재신선생(愼歸齋申先生), 산광조선생(山狂曺先生), 두문자성선생(杜門子成先生), 용호맹선생(龍湖孟先生), 원촌조선생(遠村曺先生), 휴암임선생(休菴林先生), 송암박선생(松菴朴先生) 이상의 十七선생이 모셔져 있다. 또 살펴 보건데 두문동(杜門洞) 어귀에 임금이 내린 비석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영조즉위(英祖即位) 二十七년에 건립한 것이니, 그 글에 쓰여 있기를 『전조의 나라의 충신이 이제는 어데 있는고 그 동리에 이 비석을 세워서 그 절개와 의기를 표창하노라』라고 하였고 또 하나는 영조(英祖) 신미(一七五一년)에 두문동의 전조 충신 七十二인의 절개에 감동 추모하여 그의 후손을 채용하라고 특명하고 비문을 두문동 가운데에 건립한다는 글이 있다. ○대략 국동후(鞠東厚)집에 있는 두문동서원의 글을 참고해 보니 그 서원제도가 정절실(靖節室), 항절실(抗節室)이 있으며 순절실(殉節室), 표절실(表節室)이 있으니 이 네 곳은 七十二현을 모신 곳이다. 그런데 국씨(鞠氏) 선조로 복애공(伏崖公) 儒라는 분이 표절실(表節室)에 모셔져 있으므로 그의 후손 동후(東厚)가 다만 표절실(表節室) 十七현(十七賢)만을 적어 왔는데 이 十七현 속에 온수감(溫水監) 인선생, 직절인선생도 계시므로 곧 적어서 변의(辨疑) 속에 올릴 것을 의론했는데 마침 덕산의 종인(宗人)이 또 하나의 七十二현 명단을 적어 왔는데 이 속에는 인유장(印有章), 인문명(印文明)이라고 두 분의 이름자가 있으니 분명히 온수감 직절 두 선생의 이름인 것이 틀림없으나, 아직 어느 분의 이름자가 어느 분의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직함과 아호(雅號)만을 기록할 따름이다. 이것은 즉 국씨집에 있는 글은 후손이 八·一五해방전 신미년 六월에 직접 두문동 서원까지 가서 적어 온 것이므로 당당히 믿을 수가 있거니와 인유장(印有章), 인문명(印文明)이라는 七十二현 명단은 세상 사람들이 적어서 전하는 것이므로 표절실의 十七인 명단에 대조해 보니 다른 성씨들도 이름이 혹 맞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七十二현의 명단은 그만 두고 다만 표절실의 十七인 종친만을 적을 따름이다.(壬寅譜辨疑) 七回譜辨疑 〔註〕 杜門洞七十二賢錄에는 先祖의 諱字가 없는(七回譜辨疑)바, 위 글의 内容으로 推想해 보면 先祖께서는 七十二賢 以外의 고려 忠義로써 杜門洞 別室에 配享된 것 같으나 지금 南北分斷으로 확인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登載함.